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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 동쪽의 에덴 -14- 동쪽의 에덴

제 15화

동쪽의 에덴

   *한자 일일히 찾아서 넣는게 너무 힘겨워서 이제부터는 한자 표기를 생략할까 합니다. 이름같은 경우에는 말도 안되더라도 찾아서 넣겠습니다만 나라 이름, 수도 이름, 요마나 신수의 이름, 관직명 같은 경우는 자주 반복되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십이국의 남동쪽에 위치한 교주국은 온난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습하고 더운 기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여름은 길고 겨울은 짧고 따뜻한 편이다. 이모작 등 농사일이 많이 발달한 비옥한 평야 지대가 많은 나라이지만, 비로 인한 수해가 많이 발생하며 습한 기후때문에 음식이 잘 썩고 상처가 잘 낫지 않는 등의 단점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왕이 실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하쿠켄님…… 순주 안양에 있는 록북에서 발생된 전염병이 도저히 잡히질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수도에서 또 요마가 나와 사상자가…….”

  “군사들이 폭동을…….”

  신하들의 안색에 만연한 저 불안감을 모를 수는 없다.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아도 금새 알 수 있는 것임을…… 하쿠켄은 안절부절 못하는 신하들을 물리고, 옥좌에 앉아서 텅 빈 바닥을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소란이 거짓말 같다.

  총재, 칸사이(漢才)가 그의 등 뒤에 서서 말이 없었다. 하쿠켄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왜 당신은 여길 떠나지 않습니까?”

  “가왕도 왕이신데 어이 총재에게 말을 높이십니까. 낮추시지요.”

  “어떻게 어르신께 제가 말을 낮추겠습니까? 어차피 새 왕이 오시면 저는 물러나 같이 한 왕을 섬기는 신하가 될 것인데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좀 봐 주시지요.”

  늘 엄하고 꼬장꼬장한 총재의 얼굴 위로, 일순 미소가 올라앉았으나 곧 달아났다.

  “기린기가 올랐다는데 어이 승산하질 않으십니까? 신하들이 밤마다 간청하는 소리가 이 노복을 괴롭힙니다.”

  “저는 왕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쿠켄은 참던 한숨을 흘렸다. 겸손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거듭 중얼거린 그는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기 위해 눈가를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선왕께서 실도하실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사실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하쿠켄은 선왕의 총애를 받는 금군 장군으로서 선왕의 집무실에 자주 드나들며 때때로 그와 장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선왕은 아주 뛰어난 현군은 아니었으나 나라의 사정에 해박하고 그럭저럭 아랫 사람을 독려하며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줄 아는 왕 다운 재목이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나쁜 버릇이 있었다고 하쿠켄은 회상했다.

  “나쁜 버릇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왕께서는, 곧잘 자신이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잘 알아채시고는 하셨습니다. 그것은 좋게도 나쁘게도 쓰입니다. 선왕은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을 아주 좋게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이를테면 저의 보잘것 없는 재주를 발견하고 크게 좋게 봐 주신 것은, 남의 재주를 잘 알아보는 선왕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왕은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때문에 조정에는 활기가 넘치고 간신배들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능력 없는 자가 앉아있기에는 선왕의 주변은 너무도 빛이 났기에.”

  하지만 어느 날, 하쿠켄은 깨닫게 되었다.

  여느때와 같이 선왕과 독대하며 장기를 두고 있을 때였다. 선왕은 남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여 만약 장기를 두면서 진다 하더라도 남의 재주가 높음을 기뻐하고 칭찬으로 갚아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쿠켄과 장기를 두다 지는 그 순간, 하쿠켄은 불쾌감으로 찌푸려지는 선왕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곧 표정이 평온을 되찾고, 자신의 장기 잘 두는 것을 칭찬하며 상으로 장기 말과 장기 판을 내리셨으나 그 때의 그 기묘한 기분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조의에서도, 때때로 내뱉는 작은 말들 속에서도, 묘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독이었습니다. 비교 의식과 열등감이라는 벗어나기 힘든 독…… 선왕께서는 남의 장점을 발견하는 데에 너무도 몰두하셔서 스스로의 장점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버리고야 마신 겁니다. 만약 제가 좀 더…… 잘 보필했더라면…….”

  “하쿠켄님. 그런 것은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선왕께서 저의 검을 칭찬하시며, 웃으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쿠켄이라고 불릴 때 마다 더…… 이어지던 말은 힘없이 떨어지고, 하쿠켄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칸사이는 가왕의 우는 얼굴을 마주할 수 없으므로 조용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보는 것을 삼갔다. 하쿠켄은 잠시 말이 없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선왕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에게 자리가 돌아오도록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모반을 저지른 것만 같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 왕이 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왕의 자리를 맡은 것은 어차피 새로 오실 각왕께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일 뿐…… 결코 왕위를 탐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칸사이는 왠지 왜소해보이는 그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가왕의 자리에 앉기 전, 이 나라가 평온할 때, 선왕을 바라보며 마주 앉아 섬겼을 때, 그를 같은 신하이자 자신의 아들 같이 위로했을 때 처럼.

  그리고는 왕좌 앞으로 걸어나와, 하쿠켄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하쿠켄이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왕이 되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하들과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승산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나를 괴롭힙니까? 일어나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쿠켄이 의아한 눈으로 칸사이를 바라보자, 칸사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첫째로 승산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이요. 둘째로 가왕으로서 국민의 모범을 보이셔야 하기 때문이요. 셋째로 우리의 염원과 바램을 코우키와 새로 오실 각왕에게 전달하여 주실 대표로 하쿠켄님 만큼 적합자가 없기 때문이요. 마지막으로 밤마다 찾아와 하쿠켄님께 승산하여 달라고 부탁해달라는 신하들 때문에 노복이 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허…… 그것 참”

  칸사이가 그렇게 말을 끝마치자, 회의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누군가들이었다. 밖에서 듣고 있었는지 아까 쫓겨난 그 차림 그대로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우르르 몰려와 하쿠켄 앞에 엎드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쿠켄님!”

  대표로 나선 것은 우장군 코우뱌쿠로, 말단 관료 시절부터 절친했던 하쿠켄의 친구였다.

  “대표로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뭐…… 단체로 몰려와서 이게 무슨 난리인가!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돌아갔다가 방금 다시 왔나이다!”

  웃기지도 않는 변명이었지만 신하들 중 그것에 웃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의에 찬 눈빛을 한 코우뱌쿠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질렀다.

  “제가 따라가서 하쿠켄님이 과연 승산을 하고 오시는지 안 오시는지 확인을 안하면 도저히 못 믿을 자들이 널렸기에 자진하여 고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가지 않으시겠다면 총재 어르신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밤낮으로 잠을 못 이루게 괴롭히겠습니다!”

  “…….”

  할 말을 잃은 하쿠켄이 위엄은 가져다 버린 듯, 입을 열고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칸사이가 허허로이 웃었다.

  “이거 안 되겠습니다. 다녀오시지 않으면 이 노복이 지선들 중 최초로 불면증과 과로로 숨지게 생겼습니다, 그려!”

  “어르신…….”

  하쿠켄이 곤란한 표정으로 쩔쩔매다가, 곧 알았다고 대답하자 그제서야 신하들이 기뻐하며 서로 박수를 치고 웃었다. 이렇게 하쿠켄의 승선이 결정지어진 것이다.

  *

  하쿠켄이 영곤문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때 였다. 본디 영곤문 이후로 황해를 넘어야 하기에 많은 짐과 황씨들을 데리고 승산하는 것이 불문율과 같아, 일행이 넘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일행들 중에 황씨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없었고 짐도 얼마 없고 분위기도 느슨한 것이 도저히 승산하는 무리라고는 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대의 코우키의 요청으로 황해를 넘어 승산하지 못하도록 영곤문 앞에 사람을 모으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궁을 통해서 나라 전 지역에 알려진 사실이므로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반, 그리고 승산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의미가 없질 않느냐는 의문 반이 섞인 요상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번에는 문 앞에서 대놓고 너희중에 왕이 없다고 소리치고 돌아가버렸다 하니 과연 제 정신을 가진 기린인 것인가? 하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어찌되었든 문이 열리기까지는 일주일은 더 남은 상황이다. 하쿠켄은 임시 천막을 치고 있는 휘하 부하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와주겠다는 데도 순순히 가만히 쉬지 않는다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 협박을 해대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짐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쉬고 있노라니 새삼 주위의 소음에 귀가 따갑다.

  옆을 둘러보니 큰 소리는 아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두 남자가 티격태격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 저번에 올라온 내 친척이 그러는데 완전히 문전박대였다고 하더구만!”

  이것은 아마 저번 승산자들의 소문일 것이다. 하쿠켄은 관심이 없는 척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끼었다.

  “어쩌면 기린 쪽에서 왕을 선정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왕을 찾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기린이 말인가?”

  “그럴 수도 있잖나? 황해를 거쳐서 올라오지 말라니 이건 승산자라고 불리기도 우습구먼.”

  하쿠켄이 얌전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슬금슬금 제 수하들도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 이야기를 훔쳐듣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야 모르질 않는가. 게다가 문 앞에서 만난다 한들 황해를 지나서 만난다 한들 기린을 만나 천의를 묻는 것이 목적인데 어디서 만나든 기린만 만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제대로나 봐 주겠는가 싶으이. 얼굴만 내비치고 내뺄 심산이면 어디서 보든 결국 똑같지 않겠는가.”

  남자의 말에 함께 이야기 하던 다른 남자가 성질을 냈다.

  “어허, 사람 참! 말 한번!”

  “성내지 말게~. 승산은 딱 한 번만 허락되는데 기린 털 끝하나 못 보고 돌아갈까 걱정되는 것이지.”

  “그러면 그게 자네의 천의인 것이지!”

  그 말에 남자가 발끈해서 쏘아붙이며 두 남자가 티격태격 거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상해서라기 보다는 저런 것이 두 남자의 친밀감 표현인 것 같았다. 하쿠켄이 고개를 돌려 영곤문을 올려다보았다.

  “하쿠켄님,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큰 일 아닌가? 기린이 왕을 고르기가 싫다니. 그래서야 백치가 언제쯤 울 것인지, 그 때까지 교국이 버텨 줄 것인지 알 수가 없질 않은가?”

  “그럼 만나서 큰 소리로 훈계라도 늘어 놓으시지요.”

  “그럴까?”

  하쿠켄은 그렇게 말하며 신하들과 키득거렸다. 말만 그렇지 어떻게 한 나라의 재보에게 감히 언성을 높이겠는가.

  “듣기로는 기린의 갈기가 백색이라 합니다. 백기린이라니 기묘한 일이지요.”

  “백색은 흉조인데 천의를 계시하는 기린의 갈기가 백색이라니…….”

  그것 때문에 백성들도 말이 많았노라 수근거리는 신하들을 하쿠켄이 꾸짖었다.

  “자네들은 무슨 말을 그리 하는가? 새로운 왕만 찾아준다면 갈기 색이 대수겠는가? 게다가 앞으로 우리 나라의 재보가 되실 것인데.”

  “송구합니다.”

  하쿠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영곤문을 올려다 보았을 때, 영곤문 옆 절벽에서 희끗한 빛이 반짝였다. 무엇인가 싶어 손으로 태양을 가리며 눈을 가늘게 뜨니, 거기에 아이 하나가 앉아서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 높이 흩날리는 백색의 실타레. 남자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지만, 그 순간 소년은 일어나 절벽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아쉽다.

  아쉽다고?

  “하쿠켄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눈가에서 흰 색의 잔상이 남아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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