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십이국기) 동쪽의 에덴 -12- 동쪽의 에덴

제 12화

동쪽의 에덴

   “…….”

  “…….”

  두 쪽 다 말이 없었다. 앞에 놓여진 차만 후룩거리며 좀체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사실, 교크요가 그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의 신선이었으므로 코우키로서는 교크요에게 확실하게 답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교크요가 엄격하게 기준을 들이댄다면 어떻게든 설득해서 이겨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되려 아무 말도 안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일단 침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자, 둘의 얼굴 표정은 상반됐다. 코우키는 초조해하는 눈치였고, 교크요는 여유롭게 차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승자는 확실해 보였다.

  그 이후로 몇 분을 더 버티는가 싶었지만, 결국 코우키가 먼저 한숨을 터트렸다.

  “…… 내가 잘못했어요. 하고싶은 말이 뭐에요?”

  “호호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만, 갑자기 잘못했다 하시는 이유가?”

  “…… 모른 척 하시긴, 그만 놀리세요.”

  교크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 안의 찻물은 벌써 식어있었다.

  “제가 할 말이 있는것이 아니라, 공께서 할 말이 있으실 것 같아 자리를 마련했소만 무언가 문제라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변명이라도 해 보라고 기회를 주시는 건가요……?”

  “변명이라니, 공이야말로 모른 척은 그쯤 해주는 것이 어떻소?”

  “…….”

  코우키는 투덜거리는 듯 소리없이 입술로만 꿍얼거렸다. 그리고는 병풍 뒤에서 대기하던 여선에게 차를 새로 끓여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떠나자 코우키가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었다. 내내 긴장해서 꼿꼿했던 허리가 굽혀지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슨 말이 듣고싶으신 거에요……?”

  “호호호, 그거야 공께서 하고 싶으신 말 전부이지요. 일부러 여선을 무른 것은 그 때문 아니오?”

  코우키는 한 차례 더 꿍얼거리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 사실 처음에는 그리워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입이 마른 듯 손 끝이 찻잔을 찾았지만 이미 여선이 치운 뒤라, 그의 손끝이 애꿏은 나무의자의 손잡이를 긁어댔다.

  “저희 부모님은 저에게 무척 잘해주셨고,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어요. 봉래에서 저는 무척 행복했죠. 그래서 그 생활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은 거라고, 부모님이 보고싶은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어요. 물론, 그분들이 그립지 않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아니지만?”

  “…… 좀 다른 것 같아요.”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타국으로 불려와서, 처음 보는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익숙했던 그 곳이 그리운 것이겠지, 부모님이 보고 싶은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그 곳을 떠올리고 회상할 수록, 그 “느낌”은 천천히 부모님과 분리되어 나왔다. 그건 마치…… 빛 같은 느낌이었다. 태양 같았고,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 그에게 쏘아지는 스포트라이트였다.

  단지 그의 부모님이 그 빛과 같은 방향에 서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별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빛에서 멀리 떨어지고 난 뒤에서야, 그가 얼마나 그 빛으로부터 떨어진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지를 깨달았고,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그것이 단순히 고향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안합일 때, 왕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백성들에게 심한 소리만 듣고 봉로궁으로 도망쳐왔었죠. 혼자 우는데, 처음에는 심한 소리를 들은 게 서러워서 울었다가 나중에는 그리워서 울었어요. 서러워지면 서러워질 수록, 점점 더 봉래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되더군요. 그 곳에 이 모든 상처와 서러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점차 그리워져서……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그래서 밤새도록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어요. 쑥쓰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코우키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역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싫으니까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럼 영곤문으로 갔던 것은?”

  “그야 왕이 여기 없다는 걸 확실히 아는데, 황해를 건너오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오호호호, 공께서는 정말로…….”

  교크요는 유쾌한 듯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기뻐보였다. 눈 앞에 쑥쓰러워하는 이 작은 기린이 어찌나 예뻐보이는지…… 교크요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자, 코우키는 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몸을 교크요쪽으로 쭉 들이댔다. 교크요는 코우키가 귀여운 듯, 따라서 그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그러자 코우키는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당연히 왕을 찾으려면 봉래로 가게 되겠죠. 그 전까지는 열심히 공부할 거에요. 그러니까 협조 좀 부탁드려요.”

  “오호호, 그야 당연하신 말씀을.”

  가까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교크요의 귀에 코우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여선들한테는 제가 봉래로 떠날거라는 것, 절대 말하지 마세요. 분명 엄청 걱정할거에요. 제가 떠난 다음에 귀뜸해주시는 건 괜찮지만, 그 전에는 절대 말씀하시면 안되요.”

  “미리 말하는 편이 오히려 더 낫지 않겠소……?”

  “잔소리는 돌아 온 다음에 듣고 싶어서요.”

  교크요는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코우키는 당분간은 여기에서 머무를 것이니 어차피 당장 벌어질 일도 아니라고 했다. 문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여선이 새로 끓은 차를 들고 들어오자, 코우키는 시치미 뚝 떼고 의자에 기대어 차 시중을 받았다. 교크요는 어린 코우키가 어른처럼 구는 것이 어지간히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여선은 코우키가 당연히 꾸중을 들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하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묻지는 않고 다시 병풍 뒤로 돌아갔다. 별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코우키는 안심했다.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몇 가지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앞으로 정진하라는 말을 들은 뒤 웃으면서 헤어졌다. 테이에이는 그것이 코우키의 버릇을 나쁘게 할 까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 끝났으면 된거다.

  교크요는 앞으로 안합일이 되어 황해를 건너 내려간다면 반드시 여선들을 동행하여 데려갈 것, 그리고 3일 이상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정도라도 해 주지 않는다면 승산자들이 결과를 납득하지 못 할 것이라는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코우키도 동의했다.

  세키에이가 떠난 이후, 딱히 스승을 두고 공부하고 있던 게 아니던 코우키는 하지(夏至)가 올 때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황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데 썼다. 여선들은 하지의 안합일을 대비하기 위해 영곤문(令坤門)까지 내려가서 문을 지키는 병사들과 황민(黃民 : 황주의 민족. 붉은색 여권을 가진 사람들로서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부랑민. 황해 출신의 사람들이라고도 하며, 이 중에는 황해에서 기수(騎獸)로 기들일 수 있는 요수(妖獸)를 잡는 주씨(朱氏), 또는 봉산(蓬山)으로 승산(昇山)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동반하여 호위를 하는 강씨(剛氏)를 생업을 삼는 사람들이 있다.)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 바로 뒤쪽에 3일간 승산자들이 머물 공간을 만드는 등 매우 분주했다.

  문 바깥쪽에 거처를 삼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해(內海)가 있는 바깥쪽이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영곤문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재주국(才州國)이지만, 최근 나라가 기울고 있기 때문에 황해연안에서는 요마가 나온다. 주국의 양 쪽에 위치한 범서국(範西國)과 안주국(雁州國)은 이미 백 단위가 넘어간 안정된 치세를 보이는 나라이지만, 안주국(雁州國)옆은 현재 가장 불안정한 상태의 교주국(巧州國)이 있었다. 내해는 영토와 상관없이 뚫려있는 공간이니 요마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

  차라리 문 안쪽은 황해의 끄트머리에 불과하고, 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요마가 함부로 습격해오지 않는다. 게다가 황해 안쪽에는 혹여 문 바깥으로 넘어가는 요마가 없도록 지키는 병사들이 있다. 여선들로서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해 안쪽에서 벌어지는 편이 대응하기가 쉬웠다.

  이미 한참 전에 교국의 각 리에 해당 사항을 전하도록 급전을 넣은 관계로 안합일은 아직 며칠 남았는데 문 바깥에 벌써부터 승산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코우키는 영곤문과 이어진 절벽 끄트머리에 앉아서 그 사람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역시 없어”

  누군가 몇몇은 코우키를 발견한 모양이지만, 깎은 듯한 절벽의 높이가 상상을 초월하니 무언가 해를 끼칠수는 없을 것이다. 태평하게 절벽 밖으로 내 놓은 다리를 흔들거리던 코우키는 제 손목을 핥는 흑표범, 타이보우(待望)를 바라봤다.

  [여선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과연 여선들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곧 식사시간인 모양이다. 소년은 자세를 낮추는 타이보우의 등어리에 올라탔다. 곧 타이보우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절벽을 타고 황해 안으로 내려섰다. 지상으로 내려서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더 잘 보였다. 하긴, 문 바로 앞에서 하는 왕 선정이라니 역대 최초다. 수 많은 간이 천막들 사이로 투박하기만 했던 흙길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끝에 승산자들이 향을 올릴 사당이 세워져있다. 제법 그럴싸해 보였기 때문에 코우키는 말없이 감탄했다.

  “어떻습니까? 고생해서 마련한 것인데…… 승산자들이 돌아가면 다시 해체해서 다른 문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제대로 지어진 건물들은 아니지만요.”

  요우카의 말에, 코우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립식인거야?”

  “그렇지요. 교국에는 솜씨좋은 장인들이 많답니다. 고국의 일이라 하니 자원하여 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구나…….”

  백기린이라고 해서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자원해서 왔다는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뭐, 코우키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라를 위한 일이니 자원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찌됐든 이 사태를 만든건 코우키였으니까.

  “밖에는 이미 승산자들이 바글바글하던데…… 난 사실 문 밖에서 바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현군과의 약조를 잊으신 건 아니시지요?”

  “나도 알아, 하지만 삼일이나 그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니 또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걸.”

  그건 요우카를 포함한 여선들 모두가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코우키를 너무 풀어주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삼일간 황해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승산자들은 그들 사이에 왕이 없어서 코우키가 떠났다고 하는 게 아니라, 코우키가 왕을 선정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왕을 찾아서 내려가게 되어도 나쁜 평판에 시달릴 뿐이다.

  “교국의 국민들을 가엾게 생각하고 그들을 돌봐줄 수 있는 것은 코우키와 교왕밖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교국의 국민들…… 그들에게서 도망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까 여기에 있는거지.”

  웃어보인 코우키는 훌쩍 타이보우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어딜가려는가 여쭈는 요우카의 말에, 코우키는 말 없이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다. 보통의 기린들은 그렇게 황해를 제 집처럼 드나들지는 않는다. 제 몸을 지킬 정도의 사령만 있으면 좋으니까…… 그런데 코우키는 과할정도로 황해를 뒤지고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어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황해에서 보내더니, 오늘은 얌전히 있는 것 같았는데 또 황해로 간다고 한다.

  “너무 무리하시지는 마세요. 며칠 뒤가 안합일이니까요.”

  “여선들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코우키!”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는 요우카를 보고, 앗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은 코우키는 곧 높게 뛰어올랐다. 타이보우의 검은 신체가 화살처럼 날렵하게 숲으로 쏘아져나갔다. 코우키의 선생님이었던 엔키의 영향일까? 점차 능글맞게 커 가는 것이 점점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가서 다치지만 않으시면 좋을텐데…….”

  요우카는 요 몇 년간 부쩍 늘어난 한숨을 삼키며, 안합일 준비로 바쁜 여선들의 일손을 보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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