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십이국기) 동쪽의 에덴 -11- 동쪽의 에덴

제 11화

동쪽의 에덴

   그 때부터 코우키는 어딘가 달라졌다. 소심하고 어딘가 주저하던 기색이 사라지고,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시도하기 시작했다. 팔괘를 보고 새벽같이 황해로 향해서 사령들을 늘리는 것은 평상시의 일과같은 일이고, 여선들을 졸라서 선생님을 초빙해 이 세계에 대한 것, 그리고 각 나라의 정책들, 정치에 대한 것들을 배웠다. 지극히 기본적인 양으로도 어른들조차 학을 뗄 정도의 방대한 양이었지만 관계 없었다.

  ‘나는 왕을 납치해오는 몰상식한 기린도, 왕에게 도움이 안되는 무능력한 기린도 되고 싶지 않아.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더더욱 싫어.’

  성장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기린이 되어 왕을 잘 보필한다, 그리고 좋은 나라를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쉼 없이 배워야 했다. 코우키에게는 기묘한 확신같은 것이 있어보였다. 여선들은 어떨때는 하루 종일 황해에, 어떨 때는 하루 종일 책을 붙들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하는 코우키의 모습에 저러다 건강을 해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앞에 두고, 의지에 가득한 모습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만하라고 말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요우카는 코우키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한숨만 늘었지만, 메이요우는 돕겠다고 팔을 걷고 나서서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는 코우키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긴 메이요우도 소학은 커녕 글이나 겨우 쓰는 정도의 교육만 받았을 뿐이다. 그다지 도움이 될리도 없는데, 뭐라도 해보겠다고 옆에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코우키, 잠시 쉬고 차 한잔 드세요.”

  “응? 아…… 고마워”

  “그리고 넌 좀 일어나!”

  침까지 흘리고 있던 메이요우가 퍼드득 하고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소매로 침을 닦으며 네? 하고 되묻는 모습에 요우카가 한숨을 쉬었다. 코우키는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는다.

 “점심 이후에 또 공부하러 가시지요?‘그 청림(靑林)’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코우키의 칭찬을 하시더군요.”

  “그 분은 아는 게 많으셔서 좋아. 연국의 왕께 감사드려야겠는데…… 충분히 안정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태부(太傅)를 모셔오게 되다니”

  “그렇게 미안하시면 빨리 왕을 찾아 내려가시면 되어요. 교국이 안정되어야 태부를 교사로 보내주신 염왕(廉王)의 성의에 보답하는 것이 될테니까요.”

  그건 그렇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계속 책을 보고 있는 관계로, 요우카가 곧 그 책을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가져 온 찻잔을 코우키 앞으로 쓱 밀어놓았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요우카 때문에, 코우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집어들었다.

  “…… 뭐 괜찮잖아, 오늘까지만 가르치시기로 하셨고.”

  “청림께서는 코우키가 너무 빨리 배우시니 더 가르쳐드릴 게 없다고 말씀하시던걸요.”

  “…… 헤헤”

  청림(靑林)이라는 것은 별자로, 사실 그의 성은 세키에이(隻影)라 하여 세키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연극국(漣極國)의 지선으로, 과거에는 대학을 가르치는 교수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후에 관직에 등용되어 왕의 옆에서 조언을 하는 일을 오랫동안 했으나 왕정이 교체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직으로 밀려나는 등 수모를 당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염왕이 등극하면서 곧 복귀하여 현재는 삼공(三公)중에서 태부(太傅)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굉장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신선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나이가 많다는 진실과는 다르게, 그의 겉 모습은 30대 정도로, 상당히 동안인데다 신선 특유의 건강함과 합쳐져 무척 젊어보였다. 별호의 청(靑) 자가 괜히 들어간 것이 아닌 듯, 짙은 청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세키에이와 함께 공부를 한 지도 벌써 몇 달이다. 그 사이에 알아 낸 것은 코우키의 놀라운 재능이었다. 확실히 영특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한 번 본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졌을거라고는 여선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세키에이도 마찬가지였다.

  *

  세키에이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은 공부를 시작한 지 한달 쯔음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를 시간을 내어 방문하였는데, 한달 간은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ㅡ천제께서 내리신 태강에 대한 내용, 리목이나 야목 등 나무에서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개념 등 세계의 근간이 되는 내용들부터 기본적인 단위인 규, 보, 척 등ㅡ을 가르쳤다. 그 이후에 나라의 정책, 기본적인 궁의 구성과 관직의 이름, 정책의 커다란 틀 등에 대해서 진도가 넘어갔다.

  물론 코우키는 상당히 좋은 학생이었지만, 나라에 대한 것은 무척 어려운데다, 여섯살인 코우키가 배우기에는 과할 정도로 양이 많고 어려운 한자가 난무하는 통에, 세이케이는 사실 괜찮으니 가르쳐달라 떼를 쓰는 아이를 말려야 하는 것인가 걱정을 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남은 세 달의 시간동안, 이 작은 기린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르칠 내용의 절반만 제대로 외워도 공부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나라의 행정구역은 총 몇개입니까?”

  “총 7개로, 리(里), 족(族), 당(党), 현(縣), 향(鄕), 군(郡), 주(州) 순으로 커집니다.”

  “나라의 기반은 토지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호적을 가진 사람이 자국의 국토에서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토지를 받게 됩니다. 이 토지에 대해서 기억나는 만큼 이야기 해 보십시오.”

  “성인, 20살이 되면 농한기의 정월에 1부(夫)의 토지를 받습니다. 이 법을 정전법(井田法)이라고 합니다. 1부(夫)는 사방백보(四方百步), 넓이 일만보(一萬步)의 토지를 뜻합니다. 1부(夫)가 9개가 되면 1정(井)이 되어 한 마을을 이루게 됩니다. 또 이 9부의 토지 중 1부의 토지는 공전(公田)이라 하여, 공공의 토지로서 8할은 공용으로 사용하고, 2할로는 여름을 지낼 로가(盧家)와 밭을 만듭니다.”

  “…… 그렇다면 로와 리를 이루는 토지의 단위는 어떻게 됩니까?”

  “한 로(盧)는 여덟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고, 이 로(盧)가 3개 모여서 리(里)가 됩니다. 즉, 리(里)는 8가구의 로가 3개, 즉 24가구이며 여기에 리가를 더하여 25가구로 구성됩니다.”

  “…… 맙소사”

  세키에이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 공의 나이가 여섯이라 하셨습니까?”

  “네…… 뭔가 잘못말했나요? 잘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코우키의 반응에, 세키에이가 문득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

  “혹시, 공께서는 제가 말한 모든 말을 다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 기억하고 있는데요.”

  “기억한다면 어느 정도를……?”

  곧 전부 다요, 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세키에이는 그 말을 바로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몇 가지 시험을 내 보았으나ㅡ세키에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외워 따라하거나, 어려운 한자들을 나열하고 잠깐 보여준 뒤, 어느정도 시간 간격을 주고 나서 다시 써 보도록 하는 식이었다. ㅡ결국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만 입증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수업방식은 많이 달라져서, 그저 외워야 하는 내용은 책으로 코우키에게 미리 전달하였고 이해가 필요한 부분만 질문하고 해석해주는 식이 되었다. 코우키는 학구열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수업을 받기 전에 책을 몇 권을 받든지 날 밤을 새서라도 다 읽어갔다. 그 숙제 외에도 다른 공부들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우키가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책을 보는 것 쯔음 여선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보는 일과가 된 것이다.

  *

  여선들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일주일만에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는 전 주의 과제들에 대한 질의응답시간을 끝마친 이후에 세키에이의 배웅을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걷는 내내 두 사람은 친밀한 웃음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코우키가 여선들에 대해서 푸념하는 소리였다. 세키에이는 가만히 웃고 있다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봉산공께서는 어딜 가든지 파란을 일으키실 상이십니다. 아무래도 교국은 장차 큰 변화를 가져 올 나라가 될 것 같군요.”

  코우키가 그게 무슨 뜻이냐 묻자, 세키에이는 알듯 말듯한 얼굴로 “좋은 뜻일 수도, 나쁜 뜻일 수도…….”하고 얼버무렸다. 코우키가 금새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나라로 내려가시면 뵐 일은 요원하잖아요. 근데 헤어지는 마당에 꼭 그런 소릴 해야 되겠어요?”

  “후후후…… 늙으니 주책만 느는 군요.”

  “그 얼굴로 말하면 설득력이 없어요, 선생님”

  “이런 이런, 코우키…… 나라로 내려가시면 젊은 얼굴로 코우키가 상상도 못할 시간을 살아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만난 연왕폐하와 엔 타이호도 이미 500년을 살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아직도 봉래의 인식에 메여있다면 소생이 공께 가르쳐드린 지식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온화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눈빛 만큼은 선생님 답게 엄했기 때문에 코우키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곧 분위기가 풀어지며, 남자의 눈 끝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제 곧 춘분(春紛)이 다가오는군요. 코우키가 고를 왕이 어떤 분이실지 기대하며, 연국에서 오동궁(梧桐宮)의 봉황(鳳凰)이 교국의 새 왕의 소식을 전할 때를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 뭐, 그 왕님이 어떤 분인지는 나도 빨리 뵙고 싶지만…….”

  코우키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고, 조심해서 돌아가시라는 말을 전했다. 한 차례 부드럽게 웃은 세키에이는 곧 여선들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갔다. 멀리 배웅하러 나가는 것은 어린 기린에게는 위험한 일이었기에, 아쉽지만 코우키는 멀어지는 세키에이의 뒷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문제의 춘분이다.

  “코우키…… 저…… 차라도 한 잔 더 드릴까요?”

  “됐어”

  “그럼 과자라도…….”

  “됐다니깐”

  여선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을 서성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 달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교국 승산자들의 반응은 오래 살아 온 여선들까지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어린 코우키가 쉽게 받아들이고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책장이나 팔랑거리는 모습이, 왠지 더 불안했다.

  사고하나 거하게 칠 것 같지 않아요? 하는 메이요우의 말에 요우카가 코우키 몰래 소매로 입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직 승산자들은 황해로 올라오지조차 않았는데 왜 이런 소란들이오?”

  테이에이가 일갈하자, 그제서야 저마다 일을 하러 흩어진다. 하긴, 시기는 확실히 춘분이고, 오늘이 바로 안합일로 승산자들이 영건문(令乾門)을 넘어오는 시기이지만 봉산까지 도달하기에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아침부터 초조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테이에이에게 혼이 날 법도 했다.

  코우키는 그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좋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나갔다 올게‘

  ”네? 아침부터 어딜 가시게요?“

  ”황해에 좀 다녀오려고“

  코우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령을 불러 등에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선이 저지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늦게 지금은 안합일이라 위험합니다, 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코우키는 멀어진 뒤였다.

  *

  영건문은 2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구조물로, 마치 절벽을 깎아서 파낸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1층은 거대한 문으로서, 붉게 칠해져있다. 2층은 누각으로 붉은 기둥과 초록색 기와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누각에는 ”천백“이라고 하는 생물이 산다고 한다. 영건문이 크기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하늘까지 봉쇄할 정도로 높이가 높은 것은 아니라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기수 한 마리만 있어도 그냥 넘어 갈 정도는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1년에 딱 하루, 안합일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그 문을 넘지 못하는 까닭은 다름아닌 ”천백“이라는 생물체의 기묘함에 있다.

  이 생물은 다르게 말하면 ”문의 파수꾼“이다. 천백에 대해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의 의하면 1년에 한 번, 정식으로 문이 열리는 안합일이 아닌데도 이 문을 불법적으로 넘으려 하는 자는 천백의 번개에 맞아 즉사하고 혼백은 천백에게 먹힌다 한다. 천백은 용의 모습에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지닌 생물로서 그 생김새는 영건문의 붉은 문에 세겨져있어 승산자들이 그를 보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승산자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천백이 표효하는 소리를 들으며 영건문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황해로 들어갈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황해쪽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 저게 뭐지?“

  ”황해쪽에서 오고있는데…… 요마?!“

  ”요마가 어째서 이 곳에?“

  멀리서 달려오는 그 모습은 요수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검고 단단한 몸체는 표범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안광이 심상치 않은 것이 명백히 요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 타고 있는 자의 머리카락 색은 범상치가 않았다.

  이윽고 그 요마가 영건문 2층의 녹색의 기와에 내려앉는 것을, 사람들은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고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백색의 빛이 검은 털의 요마 위에서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백색…… 기린인가!“

  누군가가 탄성처럼 외친 말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는 순간, 2층의 누각의 창문에 열리며,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발을 구속한 흑색의 사슬이 그가 천백이 전변한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창틀을 밟고 지붕 위로 올라섰다.

  소년, 코우키가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호, 오호…… 이것 참…… 봉산공(蓬山公).“

  ”방해가 되었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노인, 천백은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전혀 아니라는 듯 껄껄 웃었다. 고금을 통 틀어 문 앞으로 왕을 맞으러 온 기린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황해까지 맞으러 오거나, 또는 봉산을 나가버리는 경우는 적잖이 있었지만…… 노인은 어린 기린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소? 왕을 모시러?“

  ”후후…….“

  소년은 쑥쓰럽다는 듯이 웃고는, 손짓으로 노인의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던 노인이 껄껄 웃으며 손뼉을 탁 쳤다.

  ”허허! 그것 참!“

  ”안될까요?“

  ”안 될 것이 무에 있겠소이까, 뜻대로 하시구려!“

  노인은 제 수염을 쓰다듬더니, 곧 흰 색의 연기처럼 변해 2층 창틀을 통해 영건문 안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탁, 하고 창틀이 닫혔다. 보고있던 승산자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멀뚱거리고 있노라니, 코우키가 기와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사해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코우키의 흰색 머리카락을 높게 흩날렸다. 코우키의 그림자에서 작은 요마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소년의 목을 휘감았다. 목도리같은 형상은 점차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 승산자들은 들어라!]

  무지막지한 성량이었다. 요마의 기술을 빌린 것이었지만 효과는 훌륭했다. 코우키는 만족스러워 하며, 이어서 말했다.

  [나는 교국의 기린, 코우키! 너희들 중에 왕은 없어!]

  ”…… 뭐라고?“

  ”무슨…….“

  봉산은 커녕 황해의 공기 한 줌도 맛보지 못한 승산자들이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왕을 선정하는 기린 본인이 하는 말이니 믿지 않기도 뭐 하다. 이번 대의 코우키가 백기린이라는 것은 이미 나라 전체에 퍼진 소문인데다, 요마를 타고 다니는 어린 아이가 기린 말고 달리 또 있겠는가? 게다가 천백이 소년의 말을 듣고 몸을 감추었다. 더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당황해서 따지고 싶어지는 건 순리였다. 승산자들이 어물쩍거리고 있으려니, 코우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너희들 중에 교국의 왕은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영건문은 열리지 않는다!]

  제 할 말 끝났다는 듯 코우키는 사령에 탑승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련이라고는 전혀 없는 태도였다. 곧 그의 흰 머리카락이 영건문 너머 황해로 사라지는 것을,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

  ”코우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도착하자 마자 들은 첫 마디부터가 저거다. 코우키는 쏟아지는 여선들의 잔소리에 귀를 막고 냅다 자리를 떴다. 봉산에서 영건문까지는 제법 거리가 길었으나, 소식은 기린같이 빨라서 벌써 여선들 전부가 영건문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야, 왕이 없는데 억지로 올라와봤자 황해에서 요마의 먹이가 될 뿐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희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시고!“

  ”그야 간다고 하면 말릴테고…….“

  ”혹시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그럼!“

  그렇게 몇 시간을 달달 볶이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다. 한 시간쯤 잔소리를 들은 시점에서, 다음 안합일에도 이럴거냐고 묻는 소리에는 그럴거라고 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그냥 안 할거라고 하고 냅다 저지를 것을, 괜히 그런다고 말 했다가 잔소리가 두 배로 늘어났다. 코우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낮인데 저녁때보다 더 지치는 느낌이었다. 한숨을 쉬며 점심 밥을 입에 집어넣고 있는데, 테이에이가 들어왔다.

  ”식사중에 방해한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크요님께서 공께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으시어“

  ”…… 현군께서?“

  벌써 현군께서도 알고 계셨나…… 코우키는 이 엄청난 정보의 속도에 질린 모양이었다. 여기에는 핸드폰도 뭣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는거지. 딴 생각에 빠진 코우키에 적응된 여선들은, 곧 코우키의 어깨를 건드려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 앗, 참…… 미안해.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

  ”…… 다음 안합일부터는 미리 말씀해주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제 아무리 왕을 미리 뵙고 싶으시다 하더라도, 공께서 혼자서 문으로 향하시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음…….“

  잔소리 2탄을 교크요에게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만나서 안 떠드는게 어딘가 싶다. 코우키가 안심하는 눈치이자, 테이에이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조만간 뵙겠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콜록“

  요우카가 곧 물을 내밀었다. 콜록거리며 물잔을 받아드는 코우키의 모습을, 테이에이는 웃으며 지켜봤다.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시도록 확실하게 잔소리를 해 달라고 현군께 특별히 청원드리고 오는 참이다. 지금 고작 여섯이신데도 이러하실진대, 이보다 더 나이를 먹으시면 철이 드실지 아니면 더 사고뭉치가 되실런지…….

  코우키의 안락한 식사시간을 위해서 테이에이가 자리를 비키자 마자, 코우키는 죽겠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깨물었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매 식사시간마다 코우키의 옆 자리에 앉는 쿄우코가, 곧 젓가락을 든 코우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코우키, 젓가락을 입에 무는 버릇을 들이시면 이가 상하십니다.]

  ”…… 이런 때까지 잔소리 하지 말아줘, 쿄우코…….“

  [후후후]

  코우코는 제 여괴의 웃음소리가 얄밉게 느껴졌다.

  ”뭐, 코우키 덕분에 여선들은 하나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네요.“

  ”…… 무슨 즐거움…… 아…….“

  하긴 전에 하계의 백성을 만나는 건 몇 안되는 여선의 즐거움이라고 했었다. 하긴 기린이 있더라도 1년에 고작 4번 뿐이니 그럴만도 했다. 코우키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노라니, 여선들은 깔깔 웃으며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냥 농담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안합일에 여선들이 얼마나 들뜨는지 봤던 코우키로서는 마냥 농담으로 듣기도 뭐했다.

  ”…… 그러면 다음에 내려갈 때 같이 가면 되잖아?“

  ”그럼 혼자 가실 생각이셨어요?“

  ”…… 아니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여선들은 눈빛 공격을 시도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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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0/8일 노벨링2014로 변환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글양식 및 A5(국판) 기준으로 18페이지 작성되었습니다.
총 글자 수는 9639글자, 공백을 제외할 시 7124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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